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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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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8-06-12 11:27 조회2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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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Ⅱ

하느님을 사랑해야할 필요가 있다

 

 

모든 복음 선포의 근원에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깊고 강한 사랑이 있다. 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 단순히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얘기할 때에는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의미를 함께 갖기도 한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성별에 대한 관념을 넘어서시기 때문에 성서는 그분을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의 모습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 현대 문화는 하느님의 부성을 상실했다. 우리는 이런 관계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이며,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와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께 이를 수 있는 길임을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고백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정체성을 상실한 이 세계를 치유하고, 서로서로가 웃는 낯으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이런 고백은 꼭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한 진리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불타게하는 기쁜 소식이며, 상업적인 물신과는 결별하도록 한다.  이것이 우리를 희망으로 충만하게 하는 기쁜 소식이다. (진리의 광채 106-108)

 

아버지로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없다. 우리는 뭔가 반가운 소식에 메말라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된다. 적어도 우리가 늘어놓는 말은 좋은 선전일 수는 있어도 복음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 사업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 안에서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시고 이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뻗어가게 하셨다(마르 1,11). 그 말씀은 단순한 말,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했다(루가 4,14). 예수님은 복음선포를 위해 온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15)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런 아버지를 아름다운 표현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을 쓸 때는 우리와는 다른 하느님의 숭고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우리와 극히 친밀하신 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분(마태 5,45)이시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돌보시는 분이다(마태 5,1-10). 그분은 특별히 아이들과 마음이 깨뜻한 사람들을 사랑했다(루가 18,15-17).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먹이시고, 들판의 꽃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게 바라보고 계신다(마태 6,26-30). 그분은 지상의 자녀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좋은 것으로 가득채우시는 분이다(마태 7,7-11).

 

예수님의 비유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칼라 사진”이다. 모든 이에게 관대하시고, 인간의 속좁은 한계에 위축되지 않으시는 분이다(가령 마태 20,1-16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그리고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하늘에서까지 기뻐하신다(루가 15,4-7; 11,32).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친밀함은 전적인 것이고 그분을 기쁨으로 들뜨게 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루가 10,21-22).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요한 4,34). “자, 여기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알아야 합니다. 유일한 진리의 하느님이시고 당신이 보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다. 아버지에 대한 끔직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나자렛 가정의 평화스러운 생활을 포기하시고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떠난다. 아버지께서 주신 거룩한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신다(루가 4,14-15). 제자들을 불러모으시고 준비시킨다음 파견하신다.

 

바리사이의 위선과 싸우고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성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했고, 임종의 순간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맡겨드리는 고백을 올린다.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아버지는 사람들이 희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완전하고 자비로운 하느님 (마태 5,48 ; 루가 6,36)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드러내는 현현이다. “나를 본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아버지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말로,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왜곡하거나 기괴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가령 “ 맘 좋은 이웃이신 하느님”, “인자한 할아버지이신 하느님”, “우리를 벌주시는 무자비한 하느님”, “요술 부리시는 하느님” “자유 방임주의의 후원자로 멀찍이 방임하시는 하느님” 등등.

 

이 모든 것은 영신수련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이 아버지에 대한 선포가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 자신의 삶과 아버지와의 관계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선포하는 수단으로서 함께하는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주님에 대한 내적인 인식을 구함으로서 내가 더욱 그분을 사랑하고 따를 수 있도록 청하라”(영성수련 104). 그러나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심으로써 아버지께 이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성령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거나 사랑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선포는 삼위일체적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복음선포가 아니다.  -계속-

 

 

편집자 주 : 이 글은 progressio에 실린 Ochagavia 신부의 글을 옮긴 것이다. 4회의 내용 중 마지막으로, Ochagavia 신부가 여러해 동안 걸친 신학적, 사목적인 반성의 열매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글들은 영성 - 사도적 그리고 이냐시안으로서의 -을 신선한 시각으로 드러내 주는데, 개인 기도와 공동체의 성찰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으로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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