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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와 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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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10-17 11:48 조회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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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신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믿음

  역사 안에서 살펴보면 교회 안에서 세 가지 성소 중 하나가 우위를 점했던 적이 한 두 차례 있었다. 수도원이 널리 퍼지던 시대에는 남녀 수도자들이 큰 힘을 발휘하였고 때때로 성직자들-사제나 주교-의 사목권까지 사용하여 자신들에게 복종하게 하였다. 중세 동안에는 평신도 공작이나 왕족들, 군주들이 교회를 통제하였고, 종종 교계 질서를 단지 미사만을 집전하는 기관으로 전락시켜버린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교계 제도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교회는 모든 사도직이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공동의 생활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공동의 소명을 갖게 되었고, 성사를 통하여 생명을 주신 은총을 함께 누리고 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한 공동체 일원이며 성령의 선물 안에서 동일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의 공동의 사목을 가지고 있으며 지역 교회 안에서 동일한 제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는 많은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의 마음에 교계제도와 동일시 되어 왔다. 평신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하는 영역들을 짚어 보고자 한다. 

  

평신도들의 삶의 존엄함을 인식하기 

  그리스도인이라는 특별한 소명은 세례에 달려 있다. 세례를 통해 각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되며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성령의 선물과 예수의 세가지 사명 - 왕직, 예언직, 봉사직- 에 참여함으로써 평신도 신앙인들은 능동적이고 책임있는 교회의 일원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과거에는 물려받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개인들이 선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책임에 대해서 알고 난 후에 하는 약속이다. 평신도의 삶을 수동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전례가 상징하고 있듯이 성숙하게 책임을 지는 삶으로 규정지울 수 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은 평신도건 수도자건 성직자건 간에 이런 세례가 주는 존엄함을 존중해야 한다. . 

 

평신도의 권리에 대한 존중

  평신도 신앙인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신학적으로는 불평등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태어남으로써 공동의 존엄성을 나누기 때문이다. 1983년의 교회법에서는 모든 신앙인들의 권리, 특별히 평신도들의 권리에 대해서 인정하였고, 평신도들에 대한 전례없는 권리와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교구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제자됨의 의무, 복음적인 참여, 복음 선포의 책임, 능동적인 공동체적 의식, 사목적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중 어느 것도 위임받아야 하는 것은 없다.  

 

평신도들이 처한 위치의 중요성

  모든 믿는 이들은 공동의 존엄성과 서로의 권리에 대해서 상호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자기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는데 가장 주요한 사람은 바로 평신도들이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은 일상의 삶 안에 깊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 바로 세속적인 상황자체가 바로 평신도들의 사목적인 사명의 장(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의 소명은 결코 평신도들을 교회 안에서 사목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 교회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책임의 역할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화된 상황 안에서 봉사하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르심은 모든 평신도들의 응답이 갖는 특성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성소의 상호 관련성과 상호 독립성을 감사함

  다양한 성소의 상호 독립성은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다. 모두 함께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신비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신앙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보완해 준다. 신앙인들은 협력과 일치를 통해서 서로의 성소를 증진시키고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적 지체로서 다양한 성소는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통교를 이루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 생활을 통한 성장은 한 성소가 다른 성소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할 때는 이루어질 수 없다. 신앙인들 안에서 각 성소들이 서로간의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서 함께 협력해 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삶에 있어 독특한 복음활동을 인정함

  평신도들의 세속적인 상황은 교회 안에 평신도 신앙인들이 지는 책임의 모든 차원에 깊이 스며있다. 이러한 것들이 신앙과 일상 생활을 일치시켜 가는데 도움을 준다. 교회 내부의 현안에 있어서는 위임과 상호 책임선을 제도화되는 것이 질서를 확립하는데 좋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삶의 주요한 사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⑴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의 내용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나눔으로써, 대화를 통해서, 신앙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⑵ 그리스도의 정신을 사회적, 공적, 전문적, 정치적인 삶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⑶ 어디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⑷ 가정 생활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⑸ 전 세계의 불의에 예언자적인 도전을 하고 사회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목 활동들은 평신도들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며 법제화해야하거나 위임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모든 의무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통교를 이루는 공동체로써의 교회에 대한 전망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통교를 이루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전망을 갖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통교의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며, 개인주의와 대항하는 것이고, 일치을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며, 부르심을 받는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담당해야 할 각자의 봉사의 몫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나 전망은 더 이상 교회 조직의 상부에서 하달되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평신도들이 교회의 삶에서 주요한 영향력을 갖는 곳이며 미래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복음 선포 활동에 있어 부르심의 원천인 성사(聖事)적인 삶

  세례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름으로 복음 선포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신앙인들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더 풍성해 지고, 성소에 따라 각 성사를 통하여 힘을 얻는다. 이러한 성사는 공동 소명에 대한 카리스마나 권위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가치의 원천이며 하느님과 친밀감을 유지시켜 주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믿음에 대한 일치의 표현으로서 성사는 공동체, 희망, 협력, 믿음을 통한 형제애의 원천이다. 

 

 

 

4, 90년대의 방법

  90년대를 지내면서 교회 안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을 통해서, 신중하게 우리들의 우선순위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안에 나타난 성령의 부르심과 그 이후로 강화되어 온 쇄신의 운동은 약화되거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네 가지 우선순위다. 즉 기반조성, 성화(聖化), 복음 선포 활동, 그리고 리더쉽이다. 여기에 나는  몇가지 생각을  더 첨가해 보고자 한다. 

 

평신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 구조

  평신도와 교계제도간의 관계는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교회의 주요 업무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는 이유로 이런 관계문제를 교회 내적인 구조에 자아도취적인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사이의 불화때문에 점점 더 많은 신앙인들이 교계제도나 교계제도의 가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가고 있다.  일부는 그리스도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기도 하고, 예전만큼 교회에 열심히 나가지 않는다. 일부는 교회가 가르치는 권위에 대해서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 어떤 사회학자가 말했듯이 교계제도는 계속 존속하기는 해도 교계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사라지고 있다. 교회실무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교회법에 바탕을 둔 지금의 구조에서 평신도들은 교계 제도의 사목을 받는 수동적인 대상일 뿐이다.  우리는 현대 신학의 성과가 반영되고, 평신도들의 역동성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이 필요하다.  가톨릭 교회의 98 퍼센트가 평신도인데 반해 겨우 0.5 퍼센트가 성직자이고 수도자는 1.5 퍼센트이다. 물론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주요한 지도적 역할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어떤 신학적인 근거도 없기는 하지만 이 말이 평신도가 장악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적인 삶을 활성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동성 필요하다. 

  

평신도안에서의 신앙

  지난날 성직자들은 대부분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였고, 그 지역 내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일부 교회 실무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평신도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평신도들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에서까지 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한 교회 모임 심지어는 가족이나 평신도라는 주제로 열리는 주교회의에서 조차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다. 이러한 교회의 삶에 대한 왜곡된 접근은 뒤떨어진 신학과 평신도들이나 평신도들이 교회에 기여하는 바를 믿지 않는데 원인이 있다. 나는 전 세계적으로 교회안에서 열심히 전망을 가지고 헌신하는 평신도들이 계속되는 반대에 부딪쳐 지쳐가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렇지 않다면 관대하고 호의적이지만 권위적이고 고루한 성직자들이 하고 있는 부적절한 사목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성직자들을 주교는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은퇴를 시키거나 이동시키지도 않는다.  

  

 화해

  교회 안에서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평신도들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요구 사항이나 현안들은 점점 더 분노를 사고 있다. 평신도들이 그릇된 구조에 대해 도전하면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성소의 우월성이 손상 당한다고 화를 내며 반응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평신도들의 역할은 10년 전보다 더 무관심해졌다. 평신도의 시대나 평신도의 세대는 결코 오지 않았다. 서로를 비방하는 전형적인 정치 공동체의 모습이 이제 교회 내에서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반목과 대립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나 화해보다 더 흔한 모습이 되었다. 모든 성소는 자신들이 고백하는 근본적인 믿음, 소망,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사랑을 회복하는 쇄신의 시대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교회에 대한 신뢰성이 좌우된다. 

 

 교회의 일원으로서 평신도의 주체적인 참여 

  예수는 성소와는 무관한 일반인들에게 설교했다. 초기 공동체에는 성직자도 수도자도 없었다. 사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약 100년에서 200년 정도가 걸렸다. 이런 구조의 일부는 신학적인 측면 보다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생긴 것이다. 교회 생활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필요한 전제였다. 신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이로, 예비자 교리 교사로, 신학자로, 영성가로, 지역 교회의 실무자로, 교회의 발전과 확대를 위한 재정적인 후원자로 참여했다. 신자들은 스스로 성찬례를 거행할 사람이나 공의회에 참여할 사람등의 지도자를 뽑았다. 그리고 교리나 교의를 만드는데도 참여했다.  역사는 평신도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평신도들은 그 지방의 세속적인 군주의 농노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 지도자의 농노였다. 오늘날 본래의 통찰과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호 동등한 제자로서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섬기기위한 리더쉽

  교회의 역사을 살펴보는 것이 영감을 준다. 그러나 때때로 긍정적인 발전이 부정적인 부작용을 낳기도 하는데 이런 모습은 특히 평신도들의 삶과 공헌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분명히 선의(善意)에서 출발했던 것이 종종 더욱 평신도들의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교회 내에 거짓된 관계를 만들어 낸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는 다른 사람의 생활이나 복음 활동을 막으려는 사도들을 비난하셨다(마르 9,38-40). 만약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다시 찾고자 한다면 광범위한 회심이 필요하다. 즉 예수가 하나의 본보기로서 자신의 교회 안에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섬기는(봉사하는)리더쉽으로 회심해야한다. (마태오 20,24-28) 독재적인 ‘섬기는 리더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평신도를 위한 영성

  우리는 평신도를 위한 그리스도인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결혼, 성생활, 일, 공적이고 정치적인 봉사, 교육, 사회 비판과 도전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영적인 투신 안에서 통합되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때때로 삶의 방식을 제한하려는 수단으로 성인들을 활용하고, 자신들의 공적인 가르침과 관습을 강화시키기 위한 본보기로 제시하곤 한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금욕주의자들이고 85 퍼센트가 주교이며 평신도는 극히 드문데다 결혼한 사람은 더욱 적다. 이러한 교회실무자들이 제안하는 영적인 본보기들은 대부분 오늘날의 개발 도상국에 사는 평신도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살피기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을 진지하게 재평가하는 작업을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정직하게 재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권리로 혹은 예수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가르침들은 (교회 구조 같은 것)은 아주 인간적인 것으로 이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변명이다. 일부 구조나 의식이 예수님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측면이나 역사 안에서 권력의 역할이 신앙적인 합리화로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규율상의 관습이 교회의 삶에서 신학적이고 근본적인 것처럼 드러나서는 안된다. 

 

  신실한 평신도 신앙인들의 역할은 교회의 역사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즉 신약시대의 성숙함과 책임에서 봉건주의적인 수동성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바티칸 공의회 이후 동등한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촉구받기까지 변해왔다.  우리는 현재의 쇄신을 기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산재해 있는 여러가지 문제를 등안시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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