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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로 살아가는 삶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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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10-21 11:48 조회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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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내적으로 이해하고 맛보기 - 평신도로 살아가는 삶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스럽다고 선언하였고, 이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이 요청은 교회에 신학적으로, 사목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는 아직도 이것이 미친 모든 영향들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일상을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가족, 직장, 휴식, 사회관계 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깊게 만나가는 은총의 시간이라는 것을 진실로 굳게 믿어야 한다. 평신도들이 이런 만남을 이해하고 내적으로 맛보기 위해서는 적절한 생활 방식, 자신을 깊게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내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삶이 매우 도움이 된다. 이를 살아나가는데 이냐시오의 성찰 방식이 매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 체험으로 계속 드러나고 있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 안에 있으면서..

 

  많은 경우 우리들은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을 삶에서 벗어나 기도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피정이나, 영성 수련을 하는 기간이나, 많은 활동을 하는 가운데 따로 뚝 떼어 놓은 기도시간 등을 영적으로 살아가는 시간이라고 본다. 일상 안에서 영성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너무도 평범하여,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중요한 영적 체험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세기 동안 종교적 삶은 이 세계와는 떨어진 것으로 규정되었고, 성과 속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생각해온 성스러움은 ‘고양됨’, ‘초자연적인 것’등으로 표현되었고, 영적인 것은 세속적인 것과 반대라고 여겨졌다.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영성을 있는 자리에서 떠난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 

 

  하지만 분명히, 평신도의 고유한 특징은 하느님을 일상의 삶에서 찾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매일 매일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족, 일, 이웃과의 관계, 사회적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또 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 시민 사회 활동을 할 때,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 논의할 때, 경제뿐 아니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또는 문화에 참여하면서, 신문이나 TV등 대중 매체와 접하면서, 심지어는 인터넷에서 소통하고 인터넷을 검색할 때조차도 하느님을 찾는다. 이 모든 곳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공간이다. 

 

  성 이냐시오는 이러한 현실을 내적으로 이해하고 맛보는 것이 기도라고 아주 아름답게 정의했다. 성 이냐시오는 기쁨의 성인이었고, 그가 보기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위안을 받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성숙하고자 하는 열망이 드러나고, 한 개인이 점점 깊게 하루를 살아가고, 더 명확해지고,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일상이야 말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특별한 은총의 자리이다. 일상은 “나의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곳”이고, 복음에 드러난 대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기쁨을 이해하는 곳이다. 즉 “그 안에서 내 마음이 타올랐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타올랐다”거나, “기쁨을 느꼈다”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기도가 끝날 무렵에 우리들은 삶이 자리인 도시로, 우리가 받은 사명으로 돌아와야 한다. 기도가 “내가 이것을 좋아하나, 좋아하지 않나, 이것이 나를 어떻게 느끼게 하나”등의 자기 위안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영성수련 53)라고 물으며 기도가 우리를 성숙하게 이끌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짜 위안이다. 아루뻬 신부는 기도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내적으로 이해하고 맛본다는 의미는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명확한 방식이 있다. 바로 잘 알려진 19번에 의한 영성수련 피정방식이다. 영성 수련에서 이냐시오는 “공무나 사업에 얽매여 있으며 학식이나 재능이 있는 사람”(영성수련 19번)에 대해 말했다. 이는 명확하게 평신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냐시오 자신도 평신도였고, 거의 15년 동안 평신도로서 다른 평신도들을 영성수련으로 양성하였고, 이후에 예수회원으로서 계속해서 평신도와 함께 이 체험을 살려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성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사업, 행정, 교육 - 상당 부분은 대학 - 의 영역에서 체험되고 그 안에서 나누어졌다. 이냐시오 영성, 특히 활동 중의 관상이라는 것은 분명 세상 안에서, 매일 매일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을 만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평신도 영성을 특징짓는 것은 하느님을 활동 중의 “관상”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일하며, 직장에서, 공부하면서, 가족 관계에서, 부부 관계에서, 시민 사회나 정치적인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안에서 평신도들은 하느님을 만난다. 열정적이지만 삶과 떨어진 시간 속의 영성에서 한 개인의 모든 시간과 상황을 포괄하는, 세상에서 멀어지는 전통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사는 ‘그때그때의 현실들’에 대처하는 영성으로 옮겨지고 있다. 결혼을 하고,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평신도는 수도자나 사제가 체험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이것이야 말로 세상 안에서 평신도들이 존재하는 사도적인 특성이다.


삶의 질 / 기도의 질 - 서로 연결되어 있는 

 

  영성에 대해 우리는 이미 보편적으로 우리 삶의 질은 기도의 질에 달려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삶의 여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굵직굵직하게 체험하는 중요한 영적 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안에서도 그러하다. 이냐시오는 영성 수련과 관련하여 중요한 말을 했다. “나의 모든 의향과 행동과 노력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께 봉사함을 위해서만 마련되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영성수련 46번) 다시 말해서, 그 날의 모든 특별한 체험들, 사소한 일에서부터 아주 중요한 일까지 모든 것이 일상에서 “원리와 기초”에 기반한 순간순간의 식별을 통해 하느님 체험으로 바뀔 수 있다.

  영성 수련과 삶의 관계에 대한 글을 써온 사람들이 있다. 다리오 모야의 글에서 발췌한 다음의 구절이 영성 수련과 삶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분명 영성은 어떤 형태든 특정하고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만들어냅니다. 동시에 우리는 좀 더 깊은 차원도 이해해야 합니다. 즉, 우리들은 살아나가는 삶의 방식에 따라 영적인 측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생활 방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영성이 성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의 체험할 수 없게 만드는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반면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생활 방식도 있습니다. 꼭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는 하느님 체험을 더 쉽게 해 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막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지 않습니까? (다리오 모야.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페루 이냐시오 영성 센터 발행)

 

  다리오 마요는 이 글에서 과거, 옛날의 향수와 미래나 꿈 등으로 도피하지 않고 일상의 삶 안에서 ‘현재의 아름다움’을 사는 생활 방식에 대해서 제안한다. 그는 현재에서 도망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때로는 피정 등 하느님을 보다 잘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뜻은,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삶에 있어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일들을 선택하고,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의 여러 상황에 대처해 나갈 때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냐시오가 말한 ‘모든 현실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매일의 의식 성찰을 할 때 도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일상생활 : 삶의 질을 드러내는 징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도의 질을 높이는 것, 기도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이런 삶의 첫 번째 특징은 직장, 학교, 사회관계 안에서 통합된 삶일 것이다. 통합된 삶이란 삶에서 어떤 굴곡이 없이, 위기의 순간이 없이 순탄하게만 흘러간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통합된 삶은, 이냐시오의 말을 빌자면 내적으로 통합되어가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여러 가지 일로 나눠지지 않도록”(영성수련 20번)함으로써,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걱정들로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 내적으로 비교적 통합된 삶을 삶으로써 매 순간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관대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TV를 통해 세상을 보고, 쉽게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면서 집중하지 않고 있다. TV에서 보여지는 세상은 날카로운 음악, 춤, 디스코텍들의 강렬한 빛 등으로 뒤덮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가정에서, 상호 관계에서, 사회 관계에서, 우리들의 일상 생활과 열망들을 통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동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단단한 영성을 살아나가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통합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자신을 받아들임,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자존감이라는 주제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싸울 때, 늘 하느님과 싸우게 되고, 결국 다른 사람들과 싸우게 된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더 쉽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더 쉽게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아마 “실례합니다”일 것이다. “실례합니다만 몇 시인가요?”“실례합니다만 이 서류 드릴까요?”예의를 표현하는 말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것은 오랜 세월동안의 배타주의, 노예상태, 심지어는 인종 차별주의와도 일맥상통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자존감이 낮다는 것도 표현한다. 다양한 차원에서 자신감이 늘어나고 자존감이 향상되고 있지만, 각 개인에게는 여전히 너무나 많은 상처와 수치와 복잡함과 좌절이 있다. 학창 시절 동안 배인 권위주의를 약화시키고, 개인주의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초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나는 아름다운 노래 한 곡을 들려주고 싶다. 이 노래는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작자 미상이다)

 

나는 진정한 너의 모습을 알고 있어,

그러니 너 자신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기쁘게, 귀하게 여기고

온전히 용서해 줘.

 

너 자신에게 관대하게 대해 줘.

균형 잡힌 시선으로

충분히 축복해 주고,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가져.

의식적으로 너 자신에게 힘을 불어 넣고,

그 힘을 사방으로 표현하고,

열과 성을 다해 따라서

너의 모든 마음을 다해 봉사할 수 있도록.

 

늘 분명하게 기억하렴.

고개를 들어 크게 웃어,

어디에 있건 너 자신을 사랑하고,

항상 네가 먼저 너 자신을 기억해 줘.

 

     나는 이 노래가 예수님께서 성서에서 하신 말씀을 아름답게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라...”

 

     또 통합적인 삶은 포스트 모던 문화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이며 역동적인 가치들에 기반한 방식을 찾게 하여 부패가 만연하고, 너무나 탐욕적인 움직임들이 넘쳐나는 정치, 경제, 공적 및 개인적인 삶에서 투명하게 살아가게 한다. 이런 통합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 생활 기준이다.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삶을 살아가고, 이를 위해 삶을 구조화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영적 수준에 도달하고자 할 때, 이런 윤리적인 기준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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