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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영성과 자존감 회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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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11-08 14:15 조회1,0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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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영성과 자존감 회복하기

 

Beth R. Crisp

 

 

  내가 삶 속에서 맺는 관계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는 싸움이다. 자신을 폄하하면서 스스로를 갈가리 찢을 때가 있었고, 낮은 자존감은 때로 내 삶에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많은 경우 나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내게 주어진 기회들을 스스로 제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내게 중요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아 왔다. 내게 있어 낮은 자존감은 영성수련에서 말하는(영성수련 23번), 내가 자유로워져야 할 무질서한 애착중 하나라고까지 할 수 있다. 예전에 비해 문제의 정도가 훨씬 약해지긴 했지만 어느 정도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냐시오식 기도를 해 온 여정을 나의 영적 노트를 바탕으로 나누고, 내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깨달아가는 데 왜 기도가 중요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이냐시오식 기도를 하기까지의 여정 

 

  나는 박사 과정을 밟던 가운데 이냐시오 영성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 영성 수련은 내게 또 다른 지적 탐구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영성 수련을 해나가면서 나는 점차적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당시 내 상황에 잘 맞는 영성을 찾게 된 것이었다. 영성 수련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고, 결국 나는 19번에 의한 영성수련 대피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영적 지도를 받고, 침묵 피정을 해 오고 있다. 이냐시오 영성에 대해서 지식으로 알고자 시작했지만 점차 기도가 중심이 되는 삶의 방식을 살아나가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도와 영성에 대한 이냐시오식 접근방식이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해나가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 건강 특히 자존감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은 나뿐만 아니라 자존감과 신앙심 사이의 관련성을 연구한 몇몇 경험적인 연구에서도 드러나는 결과이다. 물론 처음에는 건강한 자존감이 나중에는 단지 이기심이나 오만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는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는데 지나치게 중점을 두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오늘날 문화에서는 다양한 차원에서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분명히 우월적인 태도로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를 받아주신다는 것뿐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위대한 계획에 파트너로 함께 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을 확신하려면 어느 정도의 자존감은 필요하다(영성수련 95번). 이냐시오 영성의 이 많은 특성들 가운데 특히 나 자신과 내 여정에 중요했던 몇 가지, 즉 상상력의 사용, 담화, 의식성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나는 또한 자신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죄를 고백할 수 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상상력의 사용

 

  영성 수련을 하는데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는 경우란 찾아보기 어렵다. 이냐시오의 가르침을 잠깐만 살펴보아도 피정자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하도록 하는 많은 훈련들을 볼 수 있다.

 

  기도 중에 성령의 손에 자신을 맡기면서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상, 자신만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이미지들은 그 신비 안에서 기도하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 이미지는 차들이 바삐 달리는 도로일 수도 있고, 별빛이 비치는 오솔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사람과 대화하고자 마련하신 공간이다.

 

  이성적인 것을 훨씬 더 강조하는 가톨릭 전통 안에서 자랐기에, 내게는 이렇게 상상력을 쓰는 것이 새롭고, 중요하고, 독특하게 다가왔다. 라비니아 바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게 장면을 상상할 때,..... 나를 구속하는 것들은 사라집니다. 

그 빈자리에 우리의 가장 왜곡된 상들과 왜곡된 이해들을 건드리고, 치료해주는 친밀감, 

밀접함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처한 상황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우리의 집으로 와 

우리의 형제, 사랑하는 사람, 친구가 됩니다. 

성서는 살아있는 우리의 친구들과 적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따르고 골고다의 길을 걷기를 선택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서 있고 부활의 에덴동산에서 기다립니다. 

 

  하지만 내 체험에서 보면, 우리의 문제는 위에 인용한 글에 나타난 것처럼 명확하고 잘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을 이용해서 기도하는 것은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통찰로 우리를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때때로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또한 이런 기도의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위로와 확신을 얻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냐시오식 기도를 할 때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사용하면 새로운 가능성에 내 눈이 열림으로써 정신적으로 쇄신되어 갈 수 있다.

 

담화

 

  이냐시오의 영성 수련에서 제안하는 기도 방식 가운데에는 담화, 즉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있다. 담화를 하게 되면 각 개인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고, 하느님이 어떻게 답하시는지를 상상하게 된다.

  8일 피정을 시작한지 며칠 지나서 내가 했던 담화 내용을 나누고자 한다. 이런 부분에서 내가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길잡이는 내가 어떤 하느님 상을 가지고 있는지 시간을 두고 관상해 보라고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 귀중한 진주를 얻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진주를 산 사람의 비유(마태오 13:45-46)를 기도해 보라고 했다. 분명 나를 그 진주로 생각하고 기도해보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를 하다 보니, 이 성서 말씀이 아니라 마치 하느님께서 책망하듯이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하시던 말씀, “누가 너에게 말했니?”라는 말에 끌리게 되었다. 나는 기도가 어떻게 흘러갈지 맡긴 채,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를 그리고 계실지에 대한 이 두 가지 느낌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을 좀 더 깊게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과 한 담화를 나누고 싶은데, 이것은 나와 같은 한 여성이 하느님과 주고받는 대화를 상상한 것이다.

 

하느님 : 네가 예쁘지 않다고 누가 그랬니?

         바라볼 만큼 기쁨을 주지 않는다고,

         내 사랑을 받을 만큼 좋지 않다고

         너를 위해 나를 내어 놓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귀중하게 여기는 진주가 아니라고...

 

여인 :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이 맞지 않나요?

       제가 폭행당할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세상으로부터 오해받고, 경멸당하던 그 많은 순간에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삶의 고통이 정말 너무 심할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하느님: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언제나 너는 내 것이다.

        네가 그렇게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 네가 나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너를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여 사랑하고 돌봐주는 많은 멋진 사람들을 내가 보내주지 않았니?

        내가 너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꿈꿔보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들을 주지 않았니?

        내가 너에게 지력과 사랑하는 마음, 지혜라는 가장 좋은 선물을 주지 않았니?

 

여인 :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저를 파괴하게 내버려 두셨어요.

       내 자신감을 빼앗아 가도록.

       내가 항상 두 번째라고 느끼도록.

       내가 친절하게 대해질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도록. 

 

하느님 : 네가 많은 네 동료들처럼 행동하고,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느니 차라리 너의 용서를 청하고 싶구나. 나는 네가 다시는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단다. 하지만 늘 너를 사랑하고, 계속해서 그 사랑을 돌아볼 수 있도록 사람들을 보내주마. 이 점만은 믿어주기 바란다.

 

여인 : 제 믿음은 제 몸과 마음과 더불어 저를 폭행한 사람들이 앗아갔어요.

 

하느님 : 내가 너에게 내 손을 주겠다. 만약 건드리는 것도 너무 힘들면, 그냥 네 곁에서 걸어가겠다. 우리의 여정은 길고, 나는 네가 모든 것을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여인 : 저도 당신 없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오셔서 제 손을 잡아 주세요.

 

  기도 끝날 무렵 여인의 마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그녀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열린 대화 혹은 “양자 간의 상호 교류”(영성수련 231)가 있어야 그 대화가 의미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이런 솔직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 담화는 기도 하는 중 상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기도내용을 잘 성찰해 보면, 이 여인의 대답은 감정적이어서 깊이 상처받기 쉽고, 사랑의 하느님께서 어떤 특정한 상황이 생겨도 내버려두시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 하느님 쪽을 보면, 분명 감정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기도에서 더 이성적이고 지적으로 접근하시는 것 같다. 이냐시오 영성에서는 감정적인 것, 이성적인 것 사이에 우열이 없고, 둘 다에 중점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도에서 하느님과 여인의 대화 중 어떤 점이 감정적이고 어떤 점이 이성적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쨌든 두 가지 요소는 모두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이 담화에 나타나는 이미지들 가운데 어떤 것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사과를 한다든지,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는 부분들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현대 신학에서는 내 기도에 나타난 하느님 상을 설명해주는 것들도 있긴 하지만 기도할 때 분명 어느 정도 제한은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담화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담화이고, 상상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나 스스로가 이것은 괜찮고, 이것은 이상해하면서 걸러내며 기도했다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자유로이 상상하면서 내가 느끼는 분노, 하느님에게 갖고 있는 불신감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성숙시키는 것은 요원했을 것이다. 데이비드 플레밍의 “영성 수련을 현대적으로 읽기”라는 책은 영성수련 2번의 핵심을 잘 짚어내고 있다. 

 

  피정 길잡이는 성서 해석이나 신학적 측면을 강요하여 피정자들 안에서 하느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영성수련은 무엇보다도 피정 길잡이의 수사학적 가르침이나 명석한 통찰보다는 각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어나는 이해와 사랑으로 얼마나 더 많은 혜택을 입게 될 것인가가 관건이다. 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는 깊게 내재한 취향과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느낌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하느님과의 담화에서 신학적으로 참이냐, 거짓이냐는 일반적으로 핵심적인 쟁점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과 하느님에 대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냐시오 영성수련을 하게 되면 많은 경우 이렇게 성장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이냐시오 영성수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사로잡는 방식에 대해 늘 새롭게 담화를 나누고 그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 같다. 

  영성 수련을 통해 이냐시오가 원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각자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지 사람들이 계속해서 깨닫고 고백해나가는 것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서 성장해가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만드는 내 삶의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서로를 더 풍요롭게 만들고, 스스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진정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을 보다 깊이 알아가게 만드는 이러한 명확한 것들을 깨달아 가는 점이 중요하다.

 

  이 피정의 남은 기간 동안 나는 자유롭게 내 삶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깊게 살펴보았고, 그 안에서 몇 가지 결심을 해 나갈 수 있었다. 피정 마지막 날, 피정의 집 근처 숲을 거닐 때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감사의 기도, 영광송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의식 성찰

 

이냐시오가 제안한 또 다른 기도는 의식 성찰이다. 의식 성찰을 할 때, 우리는 과거를 거슬러 보면서, 최근, 보통은 그날 하루 동안, 때때로는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우리의 활동들을 성찰한다(영성수련 24번). 내가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나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예외 없이 시간을 내어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이 움직이시고 계심을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종종 놀랍게도 하느님이 내 안에서 또 내가 있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증거들을 찾을 수 있었고, 하느님이 일상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계심을 보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웃음 속에서, 친절한 말 속에서, 이메일 속에서, 그저 “안녕, 생각나서 보냈어,”라는 내용의 엽서나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바삐 다른 일을 하러갈 때 살짝 스치듯 본 무엇인가 예쁜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때로는 훨씬 긴 기간을 돌아보아야 할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게 되었을 때,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일해 오셨는지 전반적으로 살펴보게 되었다. 도전이 되는 시기도 있었고, 많은 체험 중에는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뚜렷하지 않은 -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 시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간을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릴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 바치는 기도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으셨으나

당신의 두 팔을 뻗으시어,

우리들의 심장과 마음들을 잡으셨습니다.

갈 곳을 잃고

혼란스럽고

당황하고

낙담한,

원치 않는 곳에 있는 우리들.

그러나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믿고,

때때로 우리가 달아나고 싶어 함에도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때로는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시고

아주 가끔은 신비함으로 가득 차게 해 주십니다.

 

이런 기도가 분명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누군가 그 존재가 나의 삶에서 중요했고, 고향인 호주를 떠나 먼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띠었던 사람과 작별하면서 생기는 고통을 없애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하느님께서 해 주신 것들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하느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시리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기억함으로써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도 상쇄되었다. 가까이 사는 친한 친구가 겨우 몇 사람 되지 않아 내가 약해졌다고 느끼게 될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여정의 기억들을 되살리는 것이 “나는 끔찍한 사람이야,”또는 “나는 친구를 만드는 데 영 소질이 없어.”처럼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내가 쉽게 믿어버리는 이런 말들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죄의 고백

 

이냐시오가 보기에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면 그 열매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자 하는 열망인 것 같다(영성 수련 44번). 이런 죄의 고백은 어느 정도는 의식 성찰을 통해 매일매일 할 수 있지만 때로는 전례에서 행해지는 화해의 성사라는 형태를 빌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성사적인 죄의 고백(고해성사)과 보속은 당사자가 자존감이 별로 없을 때는 꼭 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 내 죄를 고백하고자 하는 열망이 꼭 나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고자 하는 열망이라면 누군가에게 고해하고, 적절한 보속을 받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왜 내가 고해소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끔찍한 사람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좀 안도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열망과 죄를 고백하고자 하는 열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고백의 기도를 할 때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냐시오 자신도 죄와 부적절한 자책의 차이를 구별해내지 못함을 인정했고, 그러한 이유로 영성수련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노련한 길잡이가 필요하다(영성수련 345-351).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거나 좋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물방울무늬와 은총”은 하느님의 은총과 불규칙적으로 흩뿌려진 페인트를 관련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드러낸다. 내가 예측 가능한 물방울무늬로는 기본 패턴과 반복 패턴이 있는데,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잘 정돈된 완벽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방울무늬와 은총

 

장엄하신 하느님

 

저에게 물방울무늬는

규칙적이고 예측할 수 있어

마치 의미 있는 그림으로 만들어줄 

색연필을 가진 어린아이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총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흩뿌려진 물감 같고

알아듣기 어렵고

많은 경우 도전입니다,

제가 알고 믿는 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알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것들도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나는 쓸모없어”

“왜 그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그들이 정말 한 개인으로서 나에게 관심이 있나?”

“이렇게 대해주는 것은 나중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닐까?”같은 의문들.

 

그리고 이제 도전은 은총에 대해 더 배워야 하는 것

좋은 것들이 일어날 수 있고

계속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더 일어날 수 있고

그래서 은총의 하느님, 당신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제가 늦게 알아듣는 것 같아도 용서하소서.

당신의 은총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러면서 당신을 거부해도 용서하소서.

당신의 은총에 제가 응답할 때 주시지 않은 것에 실망하더라도 용서하소서.

계속해서 제게 도전해주소서, 

불규칙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은총의 얼룩들로

있는 그대로.

완벽한 물방울무늬를 이룰 필요는 없습니다.

 

이 고백의 기도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진지하다. 이것은 은총을 알아보고자 애쓰는 사람의 기도이다. 하지만 동시에 장난스러움도 함께 있다. 되돌아보면, 이 기도를 쓸 당시 내게는 여전히 자존감이 중요한 문제였지만 몇 년 전, 내 자존감이 정말 낮았을 때 했던 절망적인 기도와는 전혀 다른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냐시오 영성과 자존감 세우기

 

지금까지 이 글에서 나는 매우 개인적인 체험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 여정에서 같은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런 사람들의 영적 성장을 돕고 격려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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